열두 제자의 이름(누가복음 6:14-16)
누가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이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이라는 새 포도주를 열두 제자라는 새 부대에 담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배우는 자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든 신자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4-16절은 열두 제자들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는데 제자들의 이름이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첫 번째 선교 임무에서 둘씩 둘씩 전도여행을 보내신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마 10:1-4 -5). 우리는 제자들의 이름을 부를 때 ‘단순하고 대담한 베드로’, ‘믿음직한 안드레’, ‘의심쟁이 도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 ‘사랑과 긍휼의 사도 마태’, ‘교활한 유다’, ‘분별력 있는 나다니엘’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베드로라고도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은 예수와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진 제자 그룹의 내부 서클로 간주되었습니다. 성경은 주로 이 네 사람의 이야기로 구성되고 다른 제자들에 대한 정보는 빈약합니다. 4명의 첫 번째 그룹에는 두 가정의 형제들이었고 모두 어부였습니다. 나머지 제자들 중에 세리 마태에 대한 이야기는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소개되었지만 나머지 일곱 사도들에 대해서는 그 정보가 빈약합니다.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에서 시몬은 본래 이름이었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헬라식 표현이고 아람어로는 ‘게바’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공관복음에서 열두 사도를 열거한 목록에서 모두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었습니다( 막 3:16 , 마 10:2 , 참조 행 1:13 ).
반면,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는 세 목록 모두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었습니다(눅 6:16 , 막 3:16 , 마 10:4 ). 베드로는 열두 사도의 리더였습니다. 제자 그룹 내에서도 구심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열두 사도의 리더로 세우셨고 두 쌍의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열두 사도 그룹의 핵심 멤버로 세우셨는데. 이들은 모두 어부였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빌립과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와 도마입니다. 세번째 그룹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가룟 유다입니다.
첫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는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신 첫 번째 네 사람이었습니다(요 1:35-42). 그들은 예수님과 가장 친밀한 사람이었고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 있는 반면 세 번째 그룹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도들의 기질은 매우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충동적이고 타고난 지도자였으며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의 변함없이 말이나 행동으로 가장 먼저 반응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대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무덤이 비었다는 여자들의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달려갔습니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젊어서 빨리 달려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지체 없이 무덤에 들어가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요 20:3-5).
하나님은 특히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자들에게 설교를 함으로 3천명을 회개시키는 일에 베드로를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영적 성장에 필수적인 베드로 전후서를 썼습니다. 베드로는 서신에서 우리에게 사탄의 공격과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유대 민족을 위한 것이었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사도로 쓰임받았지만 꿈에서 “일어나 잡아 먹어라”라는 음성을 듣고 집요한 유다이즘을 버리고 유대 크리스천들과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행 10:12-14). 그는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였을 때 그의 연설로 이방 선교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이방 선교의 길을 열어놓는 결정적인 선언을 하였습니다(행 15:7-11). 그는 안디옥(갈 2:11-15)과 소아시아 지방(벧전 1:1), 고린도(고전 1:12)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후에 네로 황제의 대박해 때 체포되어 예수님의 예언대로(요 21:18-19),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클레멘트 1서 5:4).
안드레
안드레는 갈릴리 호수의 벳새다 출신으로 요한(요나)의 아들이자 시몬 베드로의 형제입니다(요 1:44).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 1:35-40).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증언함으로 그를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요 1:41).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부르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4:18-20; 막 1:16-18).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병이어 사건 당시 한 소년이 갖고 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인 놀라운 기적 사건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요 6:1-15). 그는 명절에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 중에 예수 뵙기를 원하는 헬라인들을 위해 빌립과 함께 예수께 나아가 그들을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요 12:20-22). 교회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는 스구디아에 가서 전도했고, 아가야에서 ×자형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자형 십자가를 ‘성 안드레 십자가’라 부릅니다.
야고보와 요한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로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핵심 제자 3인방이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맏형이었고 그들의 아버지의 이름이 세베대였으며, 어머니의 이름이 살로메였습니다.
그들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칭이 있었으며 그들은 이 별칭대로 감정적이고 불 같은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마리아인들을 불살라 버리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제안했는데, 여기서 그들의 불 같은 성격을 잘 나타나 있습니다(눅 9:52-54).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마 17:1; 막 9:2; 눅 9:28).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어린 소녀를 다시 살리시는 현장에 있었습니다(막 5:35-43).
그들은 경쟁심이 많아 주의 영광 중에 자기들을 예수님의 좌우 편에 앉게 해주시기를 청탁하자 다른 열 제자들이 분개하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막 10:35-41).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은 자들이었습니다(막 14:32-35; 마 26:36-37). 야고보는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함으로 사도들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행 12:2; AD 44년).
성경에서는 이 두 형제 중에서 요한에 대한 정보가 매우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는 요한이 요한복음과 요한서신과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친척이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성모 마리아의 사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칭했습니다(요 13:23; 19:26-27; 20:1-2; 21:20).
사도 요한은 전 세계 기독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올랐고 주후 70년에 로마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직전에 에베소로 왔습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를 맡아 섬겼고,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지역의 다른 교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밧모 섬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순교를 당했지만 요한은 주후 100년경 노년에 에베소에서 평화롭게 죽었습니다.
빌립
빌립은 두 번째 그룹의 리더였습니다. 세 권의 모든 공관 복음서들과 사도 행전에서, 빌립은 열 둘 중에서 다섯 번째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마 10:2-4; 막 3:14-19; 눅 6:13-15; 행 1:13). 다른 공관복음은 빌립에 대한 기사가 없지만 요한복음은 빌립이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대화를 나눈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안드레와 같은 고향인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요 1:44). 그는 예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언하였습니다. 빌립은 편견에 사로잡힌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에 대한 자세한 설명 대신 “와서 보라”라는 단순한 초청으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요 1:43-46).빌립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는 단순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요한복음의 기사는 빌립을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기 전에 빌립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다고 계산해 낼 만큼 숫자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요 6:5). 수리에 밝은 빌립은 단순하게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들고 나온 안드레와 대조가 됩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부정적 대답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안드레가 한 아이에게서 가져온 오병이어를 기뻐하시고 축사하신 후 오천 명의 무리를 먹이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요 6:1-15).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거처를 마련하러 간다는 말에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요 14:8). 그는 눈으로 봐야 믿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 사건 이후 완전히 변화되어 말년에 소아시아의 브루기아에서 사역하다 히에라볼리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돌로매
바돌로매와 관련해서 공관복음에서는 “빌립과 바돌로매”로 짝지어져서 나오고(눅 6:14; 마 10:3; 막 3:18), 사도행전에서는 “도마와 바돌로매”로 짝지어져 나옵니다(행 1:13). 요한복음에서 바돌로매라는 이름이 없고 나다나엘이 빌립과 함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43-51).
바돌로매는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 언급된 것 외에는 신약성서에서 그에 관한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은 성을 말하고 나다나엘은 개인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정식 이름은 ‘돌로매의 아들 나다나엘’이 될 것입니다. 그는 빌립의 전도를 받았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말함으로 그의 편견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내면의 순수함을 보셨습니다(요 1:47).
전통적으로 바돌로매는 에티오피아, 메소포타미아, 파티아(현재 이란), 라카오니아(현재 터키) 및 아르메니아에서 선교사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아르메니아 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명령에 따라 가죽을 벗기고 참수하여 순교했다고 합니다(AD 68년).
마태
마태는 레위라는 이름이었으며 다른 제자와 달리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자였습니다. 그는 세리로 유대 사회에서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정한 세 외에 부당하고 잔인하게 세금을 거둬들여 자기 배만 불리던 자였습니다. 그는 로마를 위해 일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의 배반자요 변절자로 취급받았고 유대 공동체 내에서 섞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세리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명성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어떠한 죄인도 회개하고 변화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그는 마태복음을 통해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고 상한 갈대와 같은 자를 부르신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었습니다. 그가 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이 강조되어 나옵니다. 그는 후에 그는 에티오피아(카스피해 남쪽 지역),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와 시리아에서 사역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도마
도마는 우리에게 ‘의심쟁이 도마’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고 ‘쌍둥이’라는 의미를 가진 ‘디두모’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요 11:16).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위해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에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질문하여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요 14:5). 그는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할 정도로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 외에는 잘 믿지 않는 자였습니다(요 20:25). 이로 인해 그는 ‘의심쟁이 도마’라는 별명이 따라붙게 되었습니다.
그는 의심이 많았던 반면 사람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그를 죽이려고 노리는 예루살렘 근처로 가고자 하실 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함으로 예수님께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요 11:16). 이것이 우리가 신약성서에서 성 도마에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오순절 이후 사도들이 흩어졌을 때 도마는 파르티아인, 메데인, 페르시아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창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열두 사도의 이름에서 끝부분에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사도보다 덜 중요함을 나타냅니다. 그는 글로바의 아내로 알려진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 ‘작은 야고보’라고 합니다(막 15:40).
그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마태의 형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마가복음 15:40에서 그가 십자가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인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와 같이 있었다는 데에서 연결시킨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로 알려져 있습니다. 글로바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중 하나였는데, 그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형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척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작은 야고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마태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마가복음 2:14에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말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동일 인물들이 많은 것을 볼 때 이 또한 불명확한 사실입니다.
알패오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2세기와 3세기에 살았던 신학자 히폴리투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어 그곳 성전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셀롯 시몬
“셀롯이라는 시몬”에서 “셀롯”은 the zealot으로 ‘열심당원’을 말하며, 이는 그가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는 명칭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가나나인 시몬”이라고 하였고 누가는 “셀롯이라는 시몬”이라고 불러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나나인”은 헬라어로 ‘카나나이오스’로 ‘열심당원’ 또는 ‘열광자’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젤로테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뜻은 ‘부글거리다, 끓다, 흥분하다’는 뜻입니다. 셀롯(젤로테스)이라는 단어는 출애굽기 20:5의 칠십인역본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에서 “질투”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시몬은 하나님을 위해 질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을 내는 자였습니다. 그는 그 방법으로 로마 권력을 전복시키려는 저항 조직원으로 활동했을 것입니다. 이는 세리로 로마 협력자였던 마태와 극명하게 대조가 됩니다.
아마도 제자 생활 초기에는 이런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둘은 서로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극과 극이 만나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이 화평하게 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예수님은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교회를 형성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분과 성별과 출신의 차이도 극복하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념을 기독교 교리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이 경우 복음이 왜곡되고 교회 성도들 사이에 파벌이 형성됩니다. 목회자는 특히 성경의 흐름 속에서 사회 문제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의 설교에 사회 문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도 안됩니다. 어차피 이 땅에서 이상적 천년 왕국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한 국가가 기독교 국가가 되어 완전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국가적 개념의 기독교 통치에 우선권을 둘 경우 분명히 교회 내에 분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편에 서서 일했던 세리 마태나 로마의 전복을 위해 열심을 내었던 셀롯 시몬을 다 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은 양극을 포용하시는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내에서 정치적 중립을 포기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찢는 죄를 범하게 될 뿐만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며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며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엡 2:14-17).
야고보의 아들 유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그 이름의 뜻이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를 “다대오”라고 하고 있고(마 10:4; 막 3:18),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했습니다(행 1:13). KJV는 “레배오, 그의 성은 다대오(Lebbaeus, whose surname was Thaddaeus)”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현대 번역본은 그냥 “다대오”라고 하였습니다(마 10:3 KJV).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에 대해 “가룟인이 아닌 유다”라고 기록했습니다(요 14:22).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가룟 유다 와 한 쌍으로 기록된 것은 슬픈 운명을 말해 줍니다. 같은 이름의 한 사람은 예수님의 사도로 남았고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배반한 배반자가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수리아 지역에서 선교를 했는데 수리아 왕 아브가르 5세의 병을 고쳤다고 합니다(유세비우스). 그러다가 그 지역에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
누가는 가룟 유다를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가룟은 유대의 한 지역을 암시하며 따라서 유다는 열두 제자 그룹에서 유일하게 갈릴리 사람이 아닙니다. 가룟이라는 이름은 ‘거짓된 것’을 의미하는 아람어가 있고, ‘염색공’을 의미하는 직업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리옷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음역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룟”이 정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선택하신 것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십자가 대속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 여러 사람을 통해 여러 상황에서 예언된 것입니다.
유다는 “마귀”(요 6:70-71 ), “도둑”(요 12:6), 불신자(요 6:64 ), 영적으로 부정한 사람(요 13:10)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제자 공동체의 재정을 맡은 사람이고 그는 헌금을 유용했습니다(요 13:29; 12:6). 예수님은 각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요 2:25), 나중에 자신을 배반할 유다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것으로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유다가 하나님의 계획에 적합했기 때문에 유다를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그의 배반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을 이용하여 그의 구속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악하게 한 것이 아니라 유다가 원래부터 믿지 않는 자요 순수하지 못한 자요 악한 자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악을 그의 대속의 죽음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신 것일 뿐입니다. 이는 원래 악한 애굽의 바로를 완고하게 하셔서 열 재앙을 내리심으로 애굽과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의 가장 악한 행동도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음을 봅니다(창 50:20). 베드로는 이에 대해 다음과 설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3-24). 유다와 종교 지도자들은 “법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미리 아신 대로 이룬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예수님을 배반한 인간적인 이유에 대해 다른 견해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유다가 예수님이 이루실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와 꿈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거듭 말씀하시자 그의 기대가 무너져 예수님을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고 말합니다(마 27:3). 그러나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은 30을 성소에 던진 뒤(마 27:3-5) 자살하였다고 말합니다(마 27:5; 행 1:18). 마태는 그가 목매어 죽었다고 하고(마 27:5), 누가는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전합니다(행 1:18).
열두 제자를 택하신 목적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는 이사야 9:1의 예언에서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예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또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열두 제자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유력한 지도자들을 택하지 않으시고 평범하고 연약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연약한 자들을 통해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고자 하셨습니다(고전 1:27-28).
또한 하나님은 복음을 낡은 가죽부대가 아닌 새 가죽부대에 넣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새 포도주와 같은 복음을 담을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은 율법과 달라서 위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진 것이 없고 미천하고 연약하고 자기를 주장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복음을 있는 그대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열두 제자와 같이 자기를 내세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가난한 자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바울과 같이 자기가 가진 학문과 지식과 배경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자기를 낮춘 사람에게 임합니다.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지식으로 여깁니다(빌 3:8).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배우는 자입니다. 우리는 제자와 신자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고자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9:23). 신자는 제자가 되어야 하고 제자는 예수님을 최고의 가치로 두어야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잘못 해석해서 천국행 티켓을 따놓은 것을 만족하고 실생활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복음을 왜곡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성격과 특징을 보면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제자 그룹 중에는 세리 마태와 셀롯 시몬과 같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이들은 하나가 되었고 그들은 합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군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열두 제자의 핵심 구성원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도 경쟁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완전히 변화되어 서로 동역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이질적인 것을 녹여 하나가 되게 하는 용광로와 같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시며 이 일에 제자들과 교회를 통해 이루기를 원하십니다(골 1: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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